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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자

'프랑스인보다 더 프랑스 요리 잘 만드는 한국인 요리사' 박효남 힐튼호텔 총주방장] 이력서 단 세줄의 성공 신화… 주방보조로 호텔에 취직, 업계 최연소 상무 발탁… 첫 현지인 총주방장 올라 삼성, 스카우트 공들여… 한남동 출장요리후 연락와 연봉 아주 많이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거절했죠 가계부 쓰는 주방장… 버려지는 식재료가 없게 보물처럼 쓰레기통 관리… 회의때 야채값 물어 모르면 눈물 핑 돌게 직원 혼내죠 손님별로 맞는 간 모두 기록… "간이 안맞아서 못 먹겠다" 유명 미식가 두번 퇴짜에 그동안 내 입맛 맞춰왔구나… 큰 깨달음을 얻었죠 대통령들, 가장 불쌍한 사람… 음식은 즐기는 건데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그 좋은 음식들 못먹고 일어나더군요 요리 도전하는 사람 많은데… 자신의 이름 석자 남기려면 그냥 열심히 해선 안되죠… 죽기살기로 노력해야 해요 박효남 총주방장은 전쟁터 같은 호텔 주방홀을‘즐겁게’진두지휘한다. “앞으로 30년은 더 요리하며 살 겁니다.”박효남은“사복을 입으면 손님들이‘누구시더라?’할 만큼 하얀 제복이 잘 어울리는 나는 천생 요리사”라며 웃었다. / 채승우 기자 요리사 박효남(51)의 손가락은 9개다. 오른손 검지 두 마디가 없다. 요리사에게 치명적 장애가 아니냐고 묻자 고개를 저었다. "온전한 네 개의 손가락이 있지 않습니까." 연탄가게 아들인 그의 학력은 중졸이다. 첫 직장인 하얏트 호텔에 주방보조로 입사할 때, '초등학교 졸업, 중학교 졸업, 조리사 면허증' 단 석 줄로 이력서를 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가방끈 짧은 것이 뭐 대수냐는 지론은 지금도 여전하다. "세상은 점점 학력보다 능력 위주 사회로 갈 테니까요." 증명이라도 하듯, 박효남은 세계 최대 호텔 체인인 힐튼그룹 역사상 처음으로 현지인 총주방장에 임명됐다. 40세였다. 하얀 제복 일색의 요리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특급호텔 주방에서 박효남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키와 몸집이 작아 가장 '볼품없는' 사람이 밀레니엄 서울 힐튼의 '음식권력'이었다. '셰프(chef)'보다 '요리사'라는 수식이 더 어울리는 '코리안 스타일'이지만, 그는 '프랑스 사람보다 프랑스 요리를 더 잘하는 한국인'으로 정평이 났다. 몇몇 스타 셰프들처럼 유학파도, 유명 요리학교 출신도 아니지만 박효남이란 이름 석 자는 요리사를 꿈꾸는 청춘들에게 전설이 된 지 오래다. 연말 손님맞이로 바쁜 박효남을 그의 30년 일터인 '시즌스'에서 만났다. 키 160㎝이지만 '강철', '거인'으로 통하는 이 남자는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이 고단한 시대를 헤쳐나가는 법. 2013년은 그가 힐튼에 입사한 지 꼭 30년이 되는 해다. ◇이건희가 탐낸 요리사 ―연말이라 바쁘시지요? "호텔 식음료팀은 1년 열두 달 중 지금이 가장 바빠요. 평월보다 매출이 배 이상 오르죠. 매년 하는 일인데도 바짝 긴장되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네요. 손님들이 '평상시와 다를 게 없군' 하시면 안 되니까 음식도 개발해야 하고요." 박효남 총주방장이 만든 양고기 요리. 프랑스 요리의 관능미를 한껏 살렸다. / 밀레니엄서울힐튼 제공 ―힐튼에서만 30년 일하셨더군요. "1987년엔가 (벨기에) 브뤼셀 힐튼호텔로 연수를 간 적이 있어요. 거기 총주방장이 힐튼에서만 25년 일한 할아버지였지요. 부주방장은 24년이고요. 우리가 다 '와~' 하고 놀랐어요. 한 호텔에서 그렇게 오래 일한다는 게 대단해 보였지요. 저도 그런 주방장이 되고 싶었던가 봅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신라호텔로 박효남을 스카우트해 가려고 공을 엄청 들였다던데, 사실입니까? "한남동으로 출장요리를 간 적이 있어요. 가서 보니 이건희 회장 댁이라 의아했죠. 신라호텔이 있는데 왜 힐튼에 출장요리를 요청했나 싶은 게. 그로부터 2주일 지나 삼성그룹에서 연락이 왔어요. 신라호텔로 자리를 옮기지 않겠느냐고. 스톡옵션에 연봉도 아주 많이 주겠다는 걸 거절했습니다. 힐튼호텔이 있고 박효남이 있는 거지, 박효남이 있고 힐튼호텔이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보수적인가요? "힐튼 와서 아내를 만났고 아이 셋 낳아 키웠어요. 동료 요리사들도 한 식구나 마찬가지죠. (힐튼호텔 소유주였던) 대우그룹이 파산할 때 울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김우중 회장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몰라도 저는 그분의 포부와 추진력을 존경합니다." ―대학 교수직도 거절한다면서요? "요리사가 요리를 잘해야지요." ―'프랑스인보다 프랑스 요리를 더 잘 만드는 한국인 요리사'라던데, 인정합니까. "프랑스 정부에서 훈장(메리트 아그리콜)까지 줬으니 못하지는 않나 봅니다(웃음)." ―업계 최연소 상무이사가 됐고, 힐튼 최초로 현지인 총주방장이 되었습니다. 성공 비결이 무엇입니까. "사장님이나 총지배인님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힐튼의 주인이라고 생각해요. 부자죠(웃음). 후배들에게도 늘 오너십,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해요. 집에서 어머님이 가계부를 쓰듯이 호텔 주방장도 가계부를 써야 합니다. 힐튼에 처음 왔을 때 스미스라는, 주방장 출신 총지배인이 있었어요. 새벽에 출근하면 이 사람은 와이셔츠 바람에 호텔 주방으로 들어와 쓰레기통부터 뒤집니다. 어릴 땐, 저 양반이 왜 저러나, 직원들을 못 믿는 건가, 했는데 이제 알겠어요. 함부로 버려지는 식재료가 많으면 음식의 질도 떨어지고 재정도 낭비됩니다. 사실 주방에는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육수를 끓이더라도 샐러드 만들 때 썼던 당근, 양파 껍질을 넣어야 진국이 우러나죠. 지나다가 발로 퉁 차고 마는 쓰레기통이 아니라 보물처럼 쓰레기통을 잘 관리하는 것도 주방장의 능력입니다." ―힐튼 요리사들은 식재료 가격을 다 압니까? "물론입니다. 당근이든, 오이든, 거위 간이든 자기가 사용하는 재료의 가격과 질을 알아야 제대로 요리를 하지요. 회의 때 느닷없이 직원들에게 채소 가격을 물어봅니다. 모르고 있었다가는 그 자리에서 눈물이 핑 돌게 혼이 나지요." ―재료를 아끼지 않고 사용해야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것 아닌가요? "손님한테 가야 할 재료를 줄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도둑놈이죠. 식재료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지혜롭게 관리할 수 있어야 좋은 요리사가 된다는 뜻입니다." ◇아침밥을 굶는 이유 박효남은 프랑스 음식을 만든다. '박효남식'으로 만들어 미식가들의 사랑을 받는다. '퓨전'은 아니라고 단호히 말한다. "프랑스 요리를 한국인 입맛에 맞게 조리하는 것뿐이죠."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전복, 새우, 해물을 즐겨 활용하고, 올리브 오일 대신 깨와 식초, 레몬을 가미해 드레싱을 만든다. 생밤으로 샐러드를 만들어 히트했고, 한국의 장(醬)류를 적극 활용한 매콤한 요리로 프랑스 사람들까지도 사로잡았다. "맛이라는 건 인류의 공통된 유산이에요. 세계화 시대에 네 것, 내 것이 따로 있나요? 내가 만들면 내 것이지요." ―미각을 유지하기 위해 아침밥을 안 먹는다면서요? "요리사가 포만감을 느끼면 게을러져요. 배고픈 상태여야 오감이 예민해지면서 풍부한 향과 맛을 만들어낼 수 있지요." ―술과 담배도 전혀 안 하시죠? "담배는 초등학교 때 마스터했어요(웃음). 화랑 담배라고, 필터 없는 담배가 있었어요.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부대에 가시고 어머니 시장 보러 가시면 아버지 담배를 몇 개비 훔쳐서 친구들이랑 이불을 뒤집어쓰고 폴폴 피웠지요. 연기가 담요에 다 배었으니 바로 들켜서는 되게 혼난 다음부터 끊었지요." ―미식가로 유명한 작가 피터 현이 박효남의 입맛을 일깨워줬다는 게 무슨 얘기입니까? "벌써 오래전 일이죠. 그분이 우리 식당에 오셔서 남프랑스식 해물탕을 주문했어요. 그야말로 최고의 재료와 와인을 가지고 만들었지요. 그런데 퇴짜를 놓더라고요. 깜짝 놀라 다시 요리해 내보냈더니 또 퇴짜예요. 테이블로 직접 찾아가 '뭐가 잘못됐습니까?' 마음 졸이며 물었더니 '간이 안 맞는다'고 하세요. 순간 '아차!' 싶데요. 그동안 나는 내 입에만 맞게 음식을 만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간을 세 번 본다는 건가요? 간 맞추기가 지금도 제일 어렵다고 하셨지요. "아무리 좋은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도 그 맛에 특별한 느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지요. 게다가 맛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기록을 하기 시작했어요. 손님들마다 맛있게 드신 것, 안 드시고 접시에 남긴 것을 분류해서. 결국 맛은 찾아가는 거였어요. 손님의 입맛에 맞게 조리하되, 때로 새로운 맛을 일깨워주는 게 훌륭한 요리사죠." ―요리사는 자기 요리에 후추와 소금을 치는 손님을 보면 자존심이 상한다면서요? "그만큼 자기 요리에 자부심이 있는 거죠. 요즘은 수프가 나오면 맛도 안 보고 무조건 후추와 소금부터 치는 손님들이 있습니다만(웃음)." ―접시를 싹싹 비워주는 손님이 고맙겠네요. "최고의 쾌감을 느끼죠. 사실 요리의 테크닉은 거의 비슷합니다. 문제는 손맛이죠. 똑같은 재료, 레시피를 가지고도 서로 다른 맛이 나오는 건, 손맛 때문이에요. 손에 맛이 들어 있는 건 아닐 테고, 결국 정성이지요. 마음이고요." ―1986년에 만난 힐튼 총주방장 요셉 하우스버거가 '영원한 스승'이라고 하셨습니다. "요리밖에 모르는 분이었어요. 야단도 많이 맞았죠. 일개 주방보조의 사소한 잘못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어요. 요리를 못한다고 혼내진 않았어요. 요리를 위한 준비를 철두철미하게 못하면 혼이 났지. 식재료 고르는 것부터 접시에 요리를 예술적으로 담아내는 것까지 허투루 하는 게 없었어요. 계약이 끝나 내일 떠나는 날인데도 밤 11시까지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으니 프로 중의 프로였죠." ―박효남의 열정도 그에 버금가지 않나요? "지금도 음식 만드는 꿈을 꾸긴 해요. 주방장이 불러대는 오더(주문내용)를 머릿속에 집어넣으려고 끙끙대면서 잡니다(웃음)." ―요리하는 게 그토록 스트레스가 됩니까? "요리엔 애프터서비스가 없으니까요. 자동차 부품처럼 리콜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아버지의 검은 땀방울 강원도 출신인 박효남은‘감자’와 인연이 깊다. 남들이 감자 3개 깎을 때 10개를 깎았다는 그는‘감자 돌려 깎기’실력으로 프랑스 현지 셰프들도 압도했다.“ 동양인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감자 깎는 모습 보고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시작했지요.” / 채승우 기자 박효남은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직업군인을 전역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온 것이 1974년. 이런저런 사업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아버지가 연탄가게를 시작하는 바람에 장남인 박효남은 중학 시절 내내 연탄을 배달했다. 동생 셋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고등학교 진학은 포기했다. "빨리 기술을 배워 부모님 편안하게 해드리는 게 목표였다"고 했다. 그러다 숙명처럼 요리를 만났다. 버스를 타고 다니며 눈여겨본 수도요리학원의 문을 두드렸다. 그때만 해도 남자가 요리한다는 건 남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박효남은 개의치 않았다. 요리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중졸 성공신화를 쓰게 했다. ―강원도 고성은 요리사 박효남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맛의 원초적 영감이고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이죠. 산과 들녘, 흙과 바람 모두요. 눈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지붕이 내려앉을까봐 눈을 치웠어요. 감자 서리해 구워먹고,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집에서 가져간 된장에다 끓여 먹으면서 놀았지요." ―오른손 검지는 어쩌다 다친 겁니까. "친구 집에 놀러가 소에게 줄 여물을 썰다가…. 피가 펑펑 쏟아지는데 처음엔 아픈 줄도 몰랐어요. 시골부대 군의관이 치료해주었는데, 지금도 겨울이 되면 시립니다." ―요리사에겐 단점 아닌가요? "전혀요. 칼을 잡거나 돌리는 기술은 자기만의 노하우로 하는 것이라 불편하지 않아요. 나머지 손가락도 없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죠. 하나만 다쳤으니 얼마나 감사한가요." ―서울로 와서 고생을 많이 했더군요. "연탄이 되게 무거워요. 양쪽에 두 장씩 집게로 집고 산동네를 오르내렸죠. 연탄이 체력을 키워준 셈이에요(웃음)." ―가난 탓에 고등학교 못 갔으니 부모님을 원망했을 것 같습니다. "연탄은 여름에 더 많이 팔려요. 어느 여름날 부모님 얼굴에 흐르는 검은 땀방울을 보았지요. 날이 더우니까 손으로 땀을 닦으면 연탄가루가 섞여 시커멓게 돼요. 그걸 보고 내가 철들었어요. 효도해야겠다, 기술 배워 돈 벌어야겠다 다짐했지요." ―학업을 계속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아졌을까요? "학력보다 더 중요한 게 자신의 심지라고 생각해요. 목표가 뚜렷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안 될 일이 없지요." ―수도요리학원에서 공부한 뒤 바로 하얏트로 가셨더군요. "하숙정 원장님이 첫 은사인데, 어린 남자애가 열심히 하니까 무척 예뻐하셨어요. 자격증 딴 뒤 바로 하얏트에 소개해주셨죠. 마침 그곳에 국내 호텔 최초로 프랑스 식당이 문을 열었어요. 비록 허드렛일만 하는 헬퍼(주방보조)였지만 요리가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집에도 안 가고 주방에 남아 혼자 연습하고. 출근할 때는 소풍 가기 전날 어린아이 마음 같았지요." ―요리 재능을 타고났다고 생각하나요? "손끝이 야물다는 소리는 자주 들었지만, 나는 전적으로 노력파예요. 호텔 식당에 들어간 게 열일곱 살 때였는데, 소스 하나, 수프 하나라도 남들보다 더 빨리 배우고 싶은 욕심으로 가득 찼었죠. 그러려면 감자 깎는 시간,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시간을 줄여야 했어요. 그래서 출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삶은 계란을 손으로 돌려가며 감자 깎는 훈련을 죽어라 했고요." ―호텔 주방의 위계가 몹시 엄격하다던데요. 프라이팬으로 맞기도 하고. "요즘 그랬다가는 폭행죄로 잡혀갈걸요(웃음). 나는 후배들에게 '요리는 인성'이라고 말해요. 어디에서나 인사 잘하고 배우려는 열정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사랑받습니다. 하나라도 더 배우지요. 내가 먼저 웃음을 줘야 상대방도 내게 웃음을 보입니다. 요리 이전에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해요." ―박효남은 후배들이 벌벌 떠는 총주방장입니까? "전쟁터 같은 호텔 주방을 진두지휘하니 엄격해야 하지만 불필요한 경직성은 깨려고 노력해요. 장난 삼아 후배들 엉덩이를 발로 차기도 하지요. 그만큼 허물이 없다는 거니까. 일하다 쌓인 스트레스는 회사에서 다 풀고 가라고, 집에는 가뿐한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다독입니다." ◇대통령의 음식 ―존 메이저 영국 전 총리도 박효남 요리에 감복했다던데, 단골손님들이 많지요? "외국 나갔다가 맛있는 음식 드시면 그 메뉴와 레시피를 직접 구해다 주는 단골손님들이 여러 분 계시지요." ―역대 대통령, 유명 정치인들도 종종 만나겠네요. "이희호 여사도 즐겨 찾으시고, 이명박 대통령 내외는 스위스 다보스포럼, G20 정상회의, 핵안보정상회의 등에서 자주 뵈었고요. 그런데 나는 대통령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 같아요. 음식은 즐기는 건데, 시간에 쫓기다 보니 제대로 드시질 못해요. 오바마 대통령 왔을 때도 청와대로 출장을 나갔는데, 정상회담이 길어지다 보니 식사할 시간이 20분밖에 안 남은 거예요. 그 좋은 음식을 거의 못 먹고 일어나더군요. 천하의 대통령이라도 내 눈엔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요." ―요리사로서 가장 영예로웠던 순간은 2010년 다보스포럼에서 한국 만찬을 준비했을 때인가요? "어떤 자리라고 소중하지 않을까요. 나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입니다. 수프 한 그릇에도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지요." ―'요리계의 박근혜'가 박효남이라는 우스갯말이 있더군요. "그렇지 않아요(웃음). 저희 식당에도 한번 오셨어요.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 꿋꿋한 여성이라 존경합니다." ―주로 고위층 인사들, 부유층 사람들을 접할 텐데 그들의 권력과 부(富)가 부럽지 않습니까? "나는 내 일이 제일 좋고 자랑스러워요. 그들과 같은 부류로 착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요. 거기에 젖어들면 허풍이 들고 요리를 망치니까요. 맛있게 먹었다, 인사하시면 그걸로 충분히 행복해요." ―에드워드 권처럼 화려한 경력을 지닌 스타 셰프들이 인기를 얻습니다. "다 잘 됐으면 좋겠어요. 안으로 꽉 차면 오래 갈 테고, 그렇지 않으면 겉만 화려하다가 끝나겠지요. 저야말로 공부를 끊임없이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학교에서 (요리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 그래서 매년 프랑스에 나가 새로운 음식을 보고 배웁니다." ―요리 그만 해야겠다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83년 힐튼호텔 개업할 때 퍼스트 쿡(요리장)으로 왔어요. 다들 승진해서 왔는데 나만 수평이동이었죠. 나이까지 어리니 동료들이 인정을 안 하고 그래서 낙담한 적 있지요. 지나고 보니 그 시련이 오히려 내가 승진을 빨리 하는 데 원동력이 됐어요. 윗사람들은 직책과 견줘 업무를 평가하는데, 동등한 실력이라면 직책이 낮은 내가 더 후한 평가를 받았던 거죠." ―요리사가 1년에 2만명씩 쏟아집니다. "우리 호텔만 해도 150명의 요리사가 있어요. 자기 이름 석 자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게 내 지론이에요. 많은 사람에게 자기 이름 석 자를 남기려면 그냥 열심히가 아니고 죽기 살기로 노력해야 합니다." ―은퇴 후 요리에 도전하는 남성들이 많습니다. "생업이 목적이든, 요리 자체를 즐기는 게 목적이든, 남자가 요리를 배우면 집안이 화목해지는 건 분명해요(웃음). 주방장을 따로 두고 식당을 경영할 생각이라도 주인이 음식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어야 성공할 확률이 높습니다." ―음식이 치유의 한 방편으로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음식은 마음의 상처도 치료해줘요. 저희 식당에 의사들이 많이 오는데 사람들 크고 작은 질병 고쳐주는 분들이 내가 만든 음식을 먹으면 행복해진다고 하니 기분 진짜 좋더군요." ―비싼 음식일수록 몸에 좋을까요? "그럴 리가요. 내 입에 맛있으면 최고지요." ―솔 푸드(soul food)가 '어머니의 된장찌개'라고 했더군요. 프렌치 셰프 박효남은 된장찌개를 어떻게 끓입니까. "육수에 야채를 먼저 넣어 끓입니다. 두부는 따로 썰지 않고 으깬 뒤 된장과 섞어 맨 마지막에 넣고요. 그래야 된장의 향이 살아납니다. 김치찌개 끓일 때 삼겹살 대신 베이컨을 넣어도 맛있지요." ―20~30년은 노력해야 요리가 무엇인지 안다고 하셨지요? "30년 됐으니까 저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하하!" ―중졸 성공신화를 썼습니다. 힘들어하는 젊은이들 격려 좀 해주시지요.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지요. 힘들다 힘들다 하면 숨쉬는 것도 힘든 법이에요. 이 험난한 인생, 끌려가는 게 아니라 내가 끌고 간다 생각하면 훨씬 신나고 보람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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